나는 아직 내 철학을 모른다
요구사항을 그대로 구현하던 개발자가 내 제품을 만들면서 철학이 필요해졌다. 아직 내 철학을 모르기 때문에, 찾으려고 철학 글을 쓴다.
오랫동안 나는 철학이 없는 개발자였다. 기술은 있었다. 누가 요구사항을 건네면 그걸 빠르고 정확하게 코드로 옮길 줄 알았고, 그걸로 충분하다고 여겼다. 왜 그걸 만드는지, 그게 누구에게 무엇이 되는지는 내가 물을 일이 아니었다. 그건 요구사항을 쓰는 사람의 몫이었다. 돌아보면 나는 요구사항을 그대로 구현하는 개발자일 뿐이었다.
그게 모자라다고 느낀 건 내 제품을 만들기 시작하면서다. 혼자 만들면 요구사항을 건네주는 사람이 없다. 무엇을 만들지, 무엇을 넣고 무엇을 뺄지, 언제 다 됐다고 할지를 모두 내가 정해야 한다. 기술은 어떻게 만드는지를 알려 주지만, 왜 그렇게 만들어야 하는지는 알려 주지 않는다. 그때 처음으로, 나에게 철학이 필요하다고 느꼈다.
철학이 무엇인지 처음 실감한 건 내가 즐겨 보는 유튜브 팟캐스트에서였다. 진행자 가운데 한 분이 유치원을 운영한다. 부모님이 하던 유치원을 이어받아, 아이들이 놀면서 배우는 교육을 한다. 그곳에는 교과서도 진도도 없다. 한번은 아이가 막혔는데, 선생님이 대신 풀어 주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. 그분은 자기 유치원에 “알아낼 수 있는 것은 너무 알려 주면 안 된다”는 철학이 있다고 말했다. 교육에도 철학이 있더라. 생각해 보면 철학은 어디에나 있다. 누구나 무언가를 옳다고 믿으며 산다. 그런데 그분은 그 믿음을 자신의 내면에 심고 그대로 자신의 일에 적용하고 있었다. 생각과 일이 따로 있지 않았다. 그 모습이 너무 멋있어 보였다.
그렇다고 그분의 철학을 빌려 올 수는 없었다. 아이들을 자라게 하는 것, 그건 그분이 자기 일 속에서 키운 그분의 의미였고, 나의 의미는 아니었다. 내가 멋있다고 느낀 건 철학의 내용보다, 철학을 품고 일하는 그 방식 쪽이었다.
다른 사람들의 철학도 들여다봤다. 적게 만들되 더 좋게 만들어라, 아무도 보지 않는 뒷면까지 제대로 만들어라, 나무의 결을 따르라. 하나같이 맞는 말이다.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. 그냥 좋은게 좋은것 같은 느낌이었다. 잘 만드는 법은 거기 많았지만, 내가 무엇을 위해 만드는지는 거기서 찾을 수 없었다. 나는 내 철학에 의미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.
의미를 제품에 넣어 본 적은 한 번 있다. 테니스 제품 Tuned를 만들면서다. 나는 테니스를 좋아한다. 그래서 그 제품에는 처음부터 분명한 생각이 하나 있었다. 사람은 스스로 고르고, 자기가 늘고 있다고 느끼고, 누군가와 함께한다고 느낄 때 무언가를 오래 한다. 그래서 이 제품은 사람을 화면 앞에 붙잡아 두는 쪽이 아니라, 사람이 테니스를 더 오래, 더 깊게 치게 만드는 쪽을 고르기로 했다. 내가 그 생각을 좋아했던 건, 그게 그냥 잘 만드는 법이 아니라 의미를 제품에 넣는 일이었기 때문이다.
다만 그건 Tuned의 철학이다. 내가 좋아하는 테니스에 대한 철학이지, 나라는 사람의 철학은 아니다. 테니스에 대해서는 무엇이 의미 있는지 말할 수 있었는데, 정작 나에 대해서는 아직 그 말을 하지 못한다.
그러니 솔직하게 말하면, 나는 아직 내 철학이 뭔지 모른다. 그래도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. 얼마 전 과거의 나를 오래 들여다본 적이 있다. 내가 정말 좋아하던 것, 잘하던 것, 자꾸 돌아가던 자리를 하나씩 꺼내 보니, 몰랐던 장점과 단점이 보였고, 가고 싶은 방향이 보였다. 그렇게 찾았듯이, 내 안에는 나도 모르는 나만의 철학이 이미 있을지 모른다. 그걸 찾는 동안 지금은 모르는 새로운 나를 만날 수도 있다. 나에게 철학은 나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다.
그래서 철학 글을 쓴다. 여기 적는 건 찾는 중에 한 생각들이다. 다 찾은 뒤에 쓰려면 아마 평생 못 쓸 것이다. 이 글들은 나의 사고실험이자, 나의 내면의 성장이자, 나 자신과 나의 제품의 밑거름이다.
언젠가 그분처럼, 내가 품은 생각이 내 일에 그대로 드러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. 그때까지는 찾는 중이라고 적어 둔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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